저는 한때 얼리 어덥터라고 불리기도 했었습니다. 새로운 전자 기기에 대한 사용욕구가 강했던지라 뭐든 최신 제품을 사용하는게 일상이었죠.
항상 그렇게 살 것 같았는데.... 어느덧 40대 후반을 바라보면서 뒤돌아보니 예전의 그런 열정은 없어졌더라구요.
새로운 것을 사용해보고 분석해보고 비교해보는 그런 열정이 없어지고 언젠가부터 익숙한 것을 더 찾고 있었습니다. 최근 제가 사용하고 있는 물건들을 보니 적게는 2~3년, 길게는 10년이 넘은 물건이 대부분이라는걸 인지하고 나름 깜짝 놀랬습니다. 자동차도 길게 타봐야 2년 타고 바꾸고 그랬는데 이제는 그런게 귀찮은 걸 떠나서 인지 자체를 못하고 있더라구요.
컴퓨터 모니터 아래 항상 자리 잡고 있는 Pen Tray 에는 오래되었지만 가장 익숙한 라미 만년필이 두자루가 있고... 노안이 와서 돋보기 안경이 항상 모니터 앞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라미 만년필을 처음 사용하게 된게 통신사에서 근무할 때 인걸로 기억합니다. 나름 대기업이라 정기적인 회의도 많았고 타 부서와의 협업도 많았던지라 PDA가 실제로 메모의 기능을 못하던 시기라서 항상 플랭클린 플래너에 필기구로 만년필이나 연필을 사용하던 버릇이 아직도 남이 있습니다. 최근에는 필기를 할 일이 없어서 만년필을 정비해두면 다음에 쓸 때 잉크가 말라서 쓰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해서 살짝 정비를 포기한 상태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옆에 없으면 뭔가 허전한 아이템 중에 하나이기 항상 곁에 두는편 입니다.
처음 글씨를 배울 때 부모님께서 항상 연필로 연습해야 한다고 샤프를 못쓰게 하셨던 기억이 나는데... 왜 하지 말라고 하는건 더 하고 싶은건지... 당시에는 샤프를 고집했는데 잔소리가 없어지니 다시금 연필이 좋아졌나봅니다. 저의 경우엔 만년필을 쓰지 않을 때는 볼펜보다 선호하는게 연필입니다.
연필을 좋아하다보니 자연스레 살짝 사치도 부리게 되는데 그 사치품이 바로.... 연필계의 에르메스라고 하는 그라폰 파버카스텔의 퍼펙트 펜슬입니다. 연필 한자루에 30만원이라고 하면 미쳤다고 하는데... 그런거 있잖아요... 그래도 꼭 하나는 갖고 싶은... 그런 아이템 중 하나가 저에게는 바로 퍼펙트 펜슬이었습니다.
연필을 최초로 만든 회사 파버카스텔.... 왠지 최초로 만든 회사라고 하니까 뭔가 장인의 숨길이 느껴지지 않나요 ? ㅎㅎㅎ
리필심 하나에 15,000원... 지우개 보호캡만 50,000원.... 여자분들의 가방에 비할건 아니지만... 연필이라는 아이템으로만 봤을 땐 사치품인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사치품이라고 하지만 명품이라고 불리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다른 연필에 비해 실사시 그립감과 필감이 아주 뛰어납니다. 연필의 정석을 보여주는 느낌이죠. 고급스러운 나무 패턴과 그 나무무늬가 주는 느낌이 그립감을 더해줍니다. 퍼펙트 펜슬이라는 이름 대로 지우게 및 연필깍이가 캡에 내장되어 있습니다. 그 캡은 백금도금으로 되어 있구요. 따뜻한 느낌을 주며 금속재질의 캡의 묵직한 느낌이 필기를 하고 싶어지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그 매력이 익숙해져서 지금도 가장 애착이 가는 필기구 중에 하나입니다.
필기구 이야기를 하려던게 아닌데 사설이 길어졌네요.
생각해보면 익숙함이라는게 참 무섭더라구요. 어떤것은 싫증이 날만한데도.... 익숙함이라는 것 때문에 버리지 못하고.... 어떤 것은 대체할 것을 못 찾아서 그냥 사용하게 되고.... 비단 그 익숙함의 대상이 꼭 물건에만 있는 것은 아닌거 같습니다. 사람 관계에서도 분명 더 좋은 사람이 있고 더 좋은 Group이 있음에도 어느덧 익숙함에 빠져서 무한 반복되는 경우들...
며칠간 집을 떠나 출장을 다녀오면서 이동시간이 길었던 탓인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주변을 돌아보니.... 정리를 하고 더 좋은 관계, 더 좋은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 것을 알고 있지만 뭔가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고 뭔가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에 대해서 귀찮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을 선택하고 있었던 것이죠. 현재가 안정적이고 편안하지도 않으면서 배움을 게을리하고 있구나... 새로운 것을 받아 들이고 새로운 관계를 이어나가는 것을 무의식에서 배제하고 있구나... 하는 반성을 했습니다.
구차한 변명이지만.... 새해가 음력으로 새해를 친다고 가정하고... 새해부터는 익숙함을 벗어나 리즈시절의 "얼리어덥터" 정신으로 새로운 관계, 새로운 사람, 새로운 환경을 거부감 없이 받아 들여보려고 합니다.
며칠 남지 않은 설 연휴를 기다리면서 새해(?) 다짐을 해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