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한국 자전거(+ 일반 교통) 인프라 비교

5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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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에 살다가 잠깐 한국에 들어와 있는 사람입니다.
 
 
스위스는 흔히 말하는 부유한 나라이고, 실제로 길은 정말 깔끔하고 차는 많지 않은데, 이 얼마 없는 차는 또 자전거들한테 엄청 친절합니다. 
 
(노란 차선은 자전거 차선입니다. 큰 도로에 이렇게 자전거 차선이 대부분 확보되어 있습니다. 없으면 차도로 가는 거고, 차는 비켜가고요.)
나라 도처에 획득고도 500m가 넘는 클라임이 길바닥 돌멩이처럼 널려 있기도 하고요. 
(사진은 집부터 편도 10km인 고도 950m, 획고 500쯤 되는 업힐 정상)
이런 자전거 동호인에겐 천국같은 곳에서 살다가 한국에 잠시 들어와 운전도 하고 자전거도 타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러 생각이 들었습니다.
 
 
먼저 스위스의 도로 환경부터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스위스는 도로교통법이 굉장히 엄격합니다. 
-횡단보도에 보행자가 있는데 차가 멈추지 않으면 면허 박탈까지 갈 수 있습니다. 보행자가 신고해요.
-자전거도 예외가 아니라, 보행자가 있으면 반드시 멈춰야 합니다. 
-음주운전 기준 자체는 한국보다 관대한 편이라 맥주 두 잔 정도는 허용되지만, 적발되면 차량에 물리적으로 시속 40km 제한을 걸어버리고 빨간 스티커를 붙입니다. 도시 외 지역에서는 출퇴근을 자차로 해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운행 자체를 막지는 않되, 위험하지 않게 강제하는 방식 같습니다.
-과속 처벌은 절대 속도가 아니라 비율 기준입니다. 제한속도 20km 도로에서 30km로 달리는 것과, 120km 고속도로에서 180km로 달리는 것이 같은 수준으로 처벌됩니다. 
-고속도로에서 우측 추월 같은 것도 벌금 셉니다.
 
 
 
더 신기한 부분은, 이런 규칙들이 실제로 굉장히 잘 지켜진다는 점입니다. 
-제한속도 80km 도로에서 50km 구간이 나오면, 모든 차가 표지판 이전부터 미리 속도를 줄입니다(올림픽대로에서 공사중 임시 시속 60 제한 지키는 사람 있을까요?). 
-3차선 고속도로에서 우측으로 추월하는 차는 몇 년을 살면서 손에 꼽을 정도로만 봤습니다. 
-횡단보도에 보행자가 보이면 양쪽 차로의 모든 차량 싹 멈춥니다. 보행자도 대부분 손 한번 들거나 따봉을 날립니다.
-오토바이가 차선 사이로 끼어드는 일도 거의 없습니다. 신호에 걸리면 차로 중앙에서 다른 차량들과 함께 대기합니다. 
-자전거 이용자의 대부분은 헬멧을 쓰고 수신호를 합니다. 바구니자전거나 따릉이 수준도 마찬가지로요. 
-깜빡이를 켜는 운전자의 비율 역시 한국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높고, 골목길에서 혼자 좌회전이나 우회전 하는 경우에도 정말 많이 켭니다.
-자전거 도로와 보행자 도로가 바로 붙어있는 경우, 보행자는 자전거 도로로 걷지 않아요.
-횡단보도 건너기 전의 보행자, 자전거 라이더 모두, 방향을 바꾸기 전에 뒤를 돌아 교통 상황을 확인합니다.
 
 
이런 환경 덕분에 이동 자체가 굉장히 편합니다.
- 대부분의 도로에 자전거 도로가 따로 확보되어 있고, 불법주차나 오토바이도 절대 없습니다(아마 벌금이 센 듯).  
(위의 사진은 자전거 도로가 아예 따로 있는 곳)
-큰 도심에서도 자전거 좌회전이 허용됩니다. 좌회전 차로, 자전거 좌회전 차로, 자동차 직/우 차로, 자전거 직/우 차로가 나란히 배치된 교차로가 흔합니다.
-차를 몰 때 차로 변경을 위해 깜빡이를 켜면 옆 차로 차량이 바로 속도를 줄여서 끼워줍니다. 
-보행자 입장에서도 신호등이 없어도 모든 차가 멈추니까 길을 건너는 데 스트레스가 없습니다.
-좌회전 노란불 됐다고 급발진 할 필요도 없어요. 30초면 신호 또 돌거든요.
 
 
 
스위스에서 3년 정도 운전하며 클락션을 울린 기억은 두 번 정도밖에 없습니다. 자전거도 몇 달 타면서 소리를 지른 적(클락션의 용도)은 한 번 밖에 없습니다.
반면 한국에서는 자전거를 타고 나가면 하루에 몇 번씩 소리를 지르게 됩니다.  
한강 자전거도로에서 맞은편 자전거가 있는데도 중앙선을 넘어 추월한다거나, 자전거를 추월하자마자 바로 우회전하는 차량, 자전거가 뻔히 직진 중인데 오른쪽에서 차 머리를 밀고 나오는 상황 등, 스위스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장면을 너무 자주 보게 됩니다.
오늘도 왼쪽차선에 있던 트럭이 우회전하겠다고 추월하려길래 헤이헤이헤이! 해야했지요.
 
  
처음에는 왜 우리나라는 이렇지 못할까라는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양쪽을 오가며 살다 보니, 단순히 시민의식 문제로만 볼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스위스는 일단, 여유가 있어요.
스위스는 그냥 인구 자체가 적습니다. 
남한의 절반 정도 되는 국토에 인구는 800만 명 남짓이예요. 
인구 밀도로 보면 한국의 4분의 1 수준인거죠.
10층이 넘는 건물도 손에 꼽고, 전쟁도 겪지 않은 중립국이라 수백 년 된 건물이어도 무너지지만 않으면 고쳐씁니다.
제가 살고 있는 집도 19세기 후반에 지어졌고, 70년도에 리모델링한 건물입니다. 벽에 랜선 포트는 꿈도 못꾸죠.
돌벽 두꺼워서 공유기 없으면 인터넷 안터지는 건물도 허다합니다.
스위스는 그냥 천년 있던 땅에 어쩌다 사람들이 모여살던 곳이 있으면 계속 거기 모여사는 느낌이랄까요.
골목길에서 사람 있으면 멈춰서서 멈춰 보내주면 돼요. 사람 몇명 없거든요.
취리히나 제네바같은 모두가 이름 들어본 도심에도 편도 3차선 도로를 찾기 어렵습니다. 좌회전이 되니 이동도 훨씬 편하고요.
 
 
한국은 일단, 도로 한정만큼은 분노가 가득한 것 같습니다.
한국은 스위스와 달리 6.25 전쟁으로 인프라를 하드리셋하고, 효율을 중심으로 철저히 재설계한 나라지요.
그래서 스위스와 달리 최신식 건물이 많아서 집집마다 신호도 다 잘 터지고 거기서 오는 편의가 크죠.
대신 골목길에서 사람이 있으면 멈춰서 보내줘라? 그러면 서울 대부분 골목길은 주차장이 되겠죠.
서울은 인구와 기능이 극도로 밀집됐고, 도로도 기본이 3차선이나 4차선입니다.
영동대로같은 7~8차선 도로도 있는데 이런 구조에서 자전거한테 좌회전 차선을 만들어주는 건 완전 탁상공론같은 이야기지요.
 
이 인구밀도에 한국인 종특 빨리빨리가 합쳐지니, 도로에는 늘 분노가 그득그득합니다. 
자라니, 퀵라니, 배달 오토바이, 김여사, 택시, 트럭, BMW, 벤츠, 외제차, K-5/K-7, 쿠페, 카니발, 노인, 아이들 등등, 
도로 위의 거의 모든 존재가 어떤 이유로든 미움의 대상이 됩니다. 
그만큼 모두가 위험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겠죠. 
 
 
실제로 욕먹을 만하게 타는 자전거도 많고, 자전거보다 더 위협적으로 운전하는 차도 많습니다. 
그렇게 위험한 환경에서는 자전거도 최고의 방어는 공격이다 같은 마인드로 탈 수밖에 없고, 그 행동이 또 다른 위험을 낳기도 합니다. 
급함과 분노로 뒤엉켜 서로가 서로를 위협하는, 실타래처럼 얽히고 섥혀 공명하는 구조 같달까요.
 
 
그렇다고 한국은 정녕 시민의식부터 답없는 후진국인가... 스위스는 선진국이고 천국인가... 라고 한다면 그건 굉장히 근시안적인 이야기일 것 같습니다. 
스위스 인구를 네 배로 늘리고 차량 수도 다섯 배쯤 늘리면 스위스도 똑같아지지 않을까 싶긴 하거든요.
그냥 환경적인, 구조적인 차이가 너무 크다보니 함부로 옳고 그름을 논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다만, 한국이든 스위스든, 서로 개선의 여지는 분명 있으리라 믿습니다(정작 살면서 최악의 자전거 사고는 스위스에서 났고, 그 사고처리 시스템은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스위스에서는 시스템 자체에 정말 화나는 일 많습니다. 미친듯이 답답하고 느리고, 아니 도대체 왜 이따위로 함? 이딴 게 선진국...? 싶은 부분 정말 많아요).
 
(어케 살았누?급 최악의 사고 - 우깜 켠 차가 우회전 안하고 직진, 맘편히 좌회전해서 들어오던 자전거를 전혀 못 본 것으로 추정... 저 뒤 차 나오는 곳이 제가 좌회전 하던 곳이었으니 한 5~10m는 자전거가 깔린채로 끌려온거죠)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불가피한 답답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특히 안전 만큼은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선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듭니다.
여기는 도싸이니, 자차 말고 자전거 관해서만 떠오르는 몇가지를 적어보려 합니다.
 
자전거가 횡단보도 초록불에 살짝 지나가는 게 나라를 팔아먹는 죄는 아닙니다. 
하지만 횡단보도에 보행자가 있다면, 그건 기다리는 게 맞습니다.
 
한강에서 앞에 따릉이가 비틀거리고 있으면 답답하고 빨리 추월하고 싶죠. 
그래도 맞은편 자전거가 브레이크를 잡아야 할 상황이라면, 잠깐 기다렸다가 추월하는 게 맞습니다.
 
자전거도로에 보행자나 러너가 얼쩡거리면 신경 쓰이고 거슬리죠. 
그런데 그 보행자가 횡단보도 위에 있으면, 팩라든 워크아웃이든 PR 도전이든 뭐든간에 그 보행자의 횡단이 절대적으로 우선이라는 사실만큼은 인식됐으면 합니다.
 
 
나의 개인적 니즈가 타인의 안전을 위협하지는 않았으면 좋겠고, 그 '안전'의 기준 자체를 좀 더 엄격히 여기는 도로 문화가 정착되면 좋겠습니다.
최소한 서로를 더 위험하게 만들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화내지 말고, 급해하지 말고, 조금만 가라앉히면 어떨까요.
 
조용한 나라에 살다보니 분노는 스스로를 좀먹는다는 걸 느끼게 되더군요.
운전을 거지같이 하는 사람에게 빵 한번 하고 "완전 XXX네 저거" 한 번 하고 넘어가면 괜찮지만,
그 분노가 하루를 망칠 정도로 끓어오르면 결국 내 손해니까요.
 
 
다들 즐라, 무엇보다도 안라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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