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에 딱 두 번 돌아오는 창고 실사 날만 되면 며칠 전부터 속이 답답해지곤 했습니다.

창고에는 책들이 3단랙에 쌓여 있습니다. 엉망으로...
그 어두컴컴하고 먼지 날리는 60평짜리 창고 안에서, 덜덜 떨리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목이 꺾여라 3단 파레트 랙 위를 올려다보는 일은 그야말로 고역이었습니다. 비닐로 꽁꽁 싸맨 책 묶음은 아래에서는 보이지도 않고, "사장님, 저 위에 노란 표지 저거 몇 권 묶음이에요?" 하고 소리쳐도 장부를 넘기던 사장님은 돋보기 너머로 눈만 깜빡이실 뿐이었죠. 옛날에는 랙 사이를 쓱 걸어 지나가기만 해도 "아, 저 구석에 영단어책 400권 박혀 있지" 하고 머릿속에 창고가 3D로 다 그려지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제는 사장님도 저도 포토메모리가 사이좋게 흐려진 탓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수천만 원짜리 대기업 물류 솔루션을 들일 형편도 안 되고, 실내에서 드론을 띄워 라이다로 랙을 스캔한다는 건 유튜브 영상에서나 보던 남의 집 이야기였습니다. 좁은 창고에서 드론을 띄웠다간 바람에 비닐 다 찢어지고 기둥에 처박히기 딱 좋으니까요.
그래서 그냥 아주 단순하고 뻔뻔하게 가보기로 했습니다. 요즘 API 비용이 헐값인 중국산 멀티모달 LLM을 뼈대로 쓰고, 부족한 건 사람 손으로 직접 때우는 방식이었습니다.

어차피 랙 규격(베이 2,590 × 깊이 1,000)은 일정하게 정해져 있으니, 사진 속 투시와 뎁스(깊이)를 보고 "이 공간에 책 묶음 블록이 몇 개나 들어가느냐"를 역산하는 덴 대단한 인공지능도, 비싼 장비도 필요 없었습니다. 아이폰 하나 들고 걸어가며 찰칵찰칵 찍은 102장의 사진과 타임스탬프만 있으면 창고 동선대로 3D 공간 배치가 뚝딱 떨어지니까요.
하지만 아무리 세상이 좋아졌어도 AI가 죽었다 깨어나도 못 푸는 지점이 있었습니다. 비닐 포장에 빛이 반사되어 제목이 뭉개지거나, 구석에 삐져나온 표지 끄트머리를 AI는 전혀 읽지 못하고 버벅거립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인간의 쓸모가 기가 막히게 빛을 발합니다.

화면에 썸네일을 띄워두면, 사람 눈은 0.1초 만에 알아챕니다. "어? 저기 노란 띠지 둘러진 거 보니까 이번에 나온 그 책이네." AI가 몇만 번을 학습해도 헷갈려할 그 찰나의 시각적 단서를, 사람은 사진 한 장만 보고도 단숨에 짚어냅니다. 사람은 화면을 보며 퍼즐 게임하듯 "이건 이 책이야"라고 이름만 툭 던져주고, 뒤에서는 부피 계산 알고리즘이 권수를 와르르 계산해 장부에 꽂아 넣습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먼지를 뒤집어쓰던 반나절짜리 육체노동이, 모니터 앞에서 커피 한잔 마시며 클릭 몇 번으로 끝내는 '10분짜리 숨은그림찾기 게임'으로 바뀐 셈입니다.
화려한 최신 장비나 드론이 없어도, 값싼 기술을 적재적소에 깔아두고 그 위에서 사람이 가장 잘하는 감각으로 화룡점정을 찍어주는 것. 결국 현장의 지독한 문제를 해결하는 건 기술의 허세가 아니라, 이렇게 여전히 빛나는 '인간의 눈과 손이 지닌 고유한 힘'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AI가, 기계가 시키는 싼 일을 외주받아 디지탈 폐지 줍기를 꿈꿉니다. 양꼬치를 꿈꾸는가 =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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