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아무도 모르는 시대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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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아무도 모르는 시대


15장

연말이 가까워지면 계약 이야기가 나온다.

몇 년째 반복되는 일인데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내년에도 계속 일할 수 있는지.

계약이 연장되는지.

조건은 그대로인지.

회사 입장에서는 숫자 하나일 수 있었다.

예산.

외부 인력.

고연차.

비용.

나에게는 생활이었다.

그날도 팀장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선배님, 아직 확정된 건 아닌데요.”

그 말만 들어도 뒤에 뭐가 올지 알 것 같았다.

“내년 인력 계획을 다시 보고 있습니다.”

“응.”

“특히 외부 인력하고 시니어 쪽 비용을 같이 보는 것 같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놀란 척할 필요도 없었다.

이미 여러 번 겪어본 일이었다.

팀장이 말을 이었다.

“저는 선배님 계속 필요하다고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알아.”

“아직 결정된 건 아닙니다.”

“괜찮아. 정해지면 알려줘.”

나는 웃었다.

팀장도 조금 안심한 표정으로 웃었다.

회의실을 나와 자리로 돌아왔다.

모니터에는 오전부터 보던 장애 분석 자동화 PoC 문서가 열려 있었다.

장애 발생 시 확인할 정보

최근 배포 내역

관련 서비스 로그

DB 변경 여부

외부 API 상태

과거 유사 장애

항목을 하나씩 적었다.

내가 장애가 날 때마다 머릿속으로 하던 순서였다.

이걸 잘 정리하면 AI가 일부는 대신 볼 수 있었다.

어쩌면 꽤 많은 부분을.

나는 문서를 적다가 잠깐 멈췄다.

조금 전 회의가 다시 생각났다.

회사는 내년에도 내가 필요한지를 계산하고 있었다.

나는 지금 내가 해오던 일을 시스템에 넘기는 방법을 정리하고 있었다.

묘한 조합이었다.

그렇다고 일부러 천천히 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 일이 내 자리를 줄일 수도 있다고 해서 대충 만들 수는 없었다.

내가 맡은 일이었다.

잘하는 게 맞았다.

오후에는 AI에게 실제 로그를 넣어봤다.

다음 로그를 보고 장애 원인 후보를 우선순위별로 정리해줘.

답이 나왔다.

생각보다 그럴듯했다.

최근 배포와의 연관 가능성.

외부 API 응답 지연.

DB 커넥션 부족.

특정 예외 반복 발생.

나는 하나씩 확인했다.

두 개는 틀렸다.

하나는 가능성이 있었다.

마지막 하나는 꽤 정확했다.

나는 문서에 적었다.

AI 분석 결과는 후보로만 사용. 실제 원인 확정 전 운영 데이터 및 변경 이력 확인 필요.

다시 생각하고 한 줄을 더 추가했다.

과거 예외 정책 및 문서화되지 않은 운영 규칙 확인 필요.

그 문장을 쓰면서 웃음이 났다.

결국 내가 늘 하던 말이었다.

AI에게도 같은 걸 가르치고 있었다.

퇴근할 때까지 계약 이야기는 다시 나오지 않았다.

나는 노트북을 닫고 집으로 갔다.

집에 들어가니 아내와 아이가 저녁을 먹고 있었다.

식탁 한쪽에는 우편물이 몇 개 놓여 있었다.

카드 명세서.

학원 안내문.

관리비 고지서.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풍경이었다.

“왔어?”

아내가 물었다.

“응.”

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식탁에 앉았다.

반찬을 덜어 먹다가 아내가 말했다.

“연말이면 또 계약 얘기 나오지?”

젓가락이 잠깐 멈췄다.

“응.”

“내년도 그대로 하는 거야?”

나는 밥을 한 숟갈 먹고 말했다.

“아직 확정은 안 됐어.”

아내는 잠깐 나를 봤다.

“그래?”

“응.”

잠시 조용해졌다.

아이 쪽에서는 휴대전화 화면에서 짧은 영상 소리가 났다.

아내가 다시 말했다.

“뭐, 되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겠지.”

그걸로 대화는 끝났다.

아내는 반찬 이야기를 했고, 아이는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말했다.

나는 적당히 대답했다.

머릿속에는 낮에 팀장이 한 말이 남아 있었다.

계속 필요하다고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그 말을 굳이 집에서 꺼내지는 않았다.

좋은 말이었지만,

확정된 말은 아니었다.

저녁을 먹고 소파에 앉아 휴대전화를 보는데 팀장에게 메시지가 왔다.

선배님, 내일 AI 장애 분석 건 새로 정리한 내용 한번 같이 보시죠.

나는 짧게 답했다.

네. 내일 보죠.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계약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PoC는 내일 계속해야 했다.

예전에도 그랬다.

회사가 어떻게 될지 몰라도,

프로젝트가 끝나도,

다음 달에 누가 남을지 몰라도,

당장 해야 할 일은 있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늘 그런 식으로 여기까지 왔다.

확실해서 계속한 적은 많지 않았다.

다음 일이 있어서 계속했다.

다음 오류가 있었고,

다음 프로젝트가 있었고,

다음 계약이 있었다.

그중 몇 개는 끝났고,

몇 개는 이어졌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 노트북을 열었다.

회사 일을 더 하려는 건 아니었다.

그냥 오늘 정리하다 만 메모가 생각났다.

운영 장애 분석 자동화 PoC

제목 아래에 짧게 한 줄 적었다.

목표: 사람이 하던 판단 과정을 어디까지 보조할 수 있는지 확인.

잠깐 생각했다.

대체라고 쓰려다가 보조라고 썼다.

그게 정확해서인지,

그렇게 믿고 싶어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노트북을 닫았다.

내년 이야기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내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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